· No.27
세로로 만들어 두면 가로는 잘라 쓰면 된다고 믿었다 — 화면비 한 줄이 완성본 22컷을 죽인 날
원작 대본이 개정되면서 화면비가 9:16 에서 16:9 로, 대사 언어가 영어에서 한글로 바뀌었다. 그 두 줄이 이미 채택된 완성본 12컷과 반려를 세 판까지 반영한 10컷, 그리고 이틀치 편성 100컷을 한꺼번에 재사용 불가로 만들었다. 화면비는 나중에 바꿀 수 있는 값이 아니었다 — 세로를 가로로 자르면 해상도가 목표 규격보다 작아지기 때문이다. 판정은 취향이 아니라 곱셈 한 줄이었고, 살아남은 것은 픽셀이 아니라 서술이었다. 그리고 판정이 기술적으로 맞다는 것과 그 파일을 지워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.
원작 대본이 다시 쓰여서 들어왔다. 개정판이 못 박은 것 중 제작에 직접 걸리는 건 두 줄이다.
전편 16:9 통일, 대사 한글 유지.
기존 산출물은 전량 9:16 세로였고 대사는 영어였다. 두 줄 다 정반대다.
대본 개정은 원래 있는 일이고 대사가 바뀌면 그 컷을 다시 만들면 된다. 문제는 이번에 바뀐 두 줄 중 하나였다. 다시 만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종류였다.
화면비는 마지막에 정하면 되는 값이라고 믿고 있었다
이 믿음은 명시적으로 결정된 적이 없다. 어디에도 안 적혀 있고 그냥 오래 깔려 있었다.
세로로 만들어 두면 나중에 가로가 필요할 때 양옆을 잘라 쓰면 된다 — 편집 단계의 상식이고 실제로 촬영물에서는 대체로 맞는다. 그래서 화면비를 편집에서 되돌릴 수 있는 값으로 분류해 뒀다. 되돌릴 수 있는 값이라고 믿으면 그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것이 되고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것은 확정하지 않은 채로 그 위에 계속 쌓게 된다.
명시적으로 결정된 적이 없다는 게 이 믿음의 가장 나쁜 점이다. 결정으로 적혀 있었으면 개정판이 들어왔을 때 그 줄을 찾아가 뒤집으면 됐다. 적혀 있지 않은 전제는 뒤집을 자리가 없고 뒤집히는 순간에야 존재가 드러난다. 그리고 그때는 이미 그 위에 뭔가가 쌓여 있다.
그렇게 쌓은 것이 채택 완성본 12컷, 반려를 세 판까지 반영해 겨우 통과시킨 완성본 10컷, 그리고 이틀 동안 만든 편성 11편 100컷이었다. 마지막 것은 9분 17초짜리다. 세 번째 반려를 반영할 때까지도 그 컷들이 세로라는 사실은 아무도 안 봤다. 반려는 전부 화면 안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고 프레임 자체는 검토 대상이 아니었다.
개정판 두 줄이 들어온 뒤 이 셋은 전부 재사용 불가가 됐다.
판정은 취향이 아니라 곱셈 한 줄이었다
두 줄 중 대사 쪽은 얼핏 가벼워 보인다. 영어를 한글로 갈아 끼우면 되는 것 같다. 그런데 우리 파이프라인에서 대사는 자막이 아니라 생성 프롬프트 안에 박혀 있다. 말이 바뀌면 프롬프트가 바뀌고 프롬프트가 바뀌면 그 컷은 다시 굽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. 언어 교체가 「고치기」가 아니라 「재생성」인 이유가 여기 있다.
그래도 대사는 재생성으로 끝난다. 화면비는 재생성조차 선택지가 아닌지부터 따져야 했다. 「잘라 쓰면 된다」가 왜 여기서 안 되는지는 숫자로 끝난다.
기존 컷은 768×1376 세로다. 이걸 16:9 로 만들려면 위아래를 버리고 가로폭을 그대로 쓴다. 그러면 768×432 가 나온다. 새 규격은 1376×768 이다.
768 은 1376 보다 작다. 잘라낸 결과가 목표보다 작다. 가로세로 어느 쪽으로 봐도 모자라기 때문에 업스케일 없이는 타임라인에 못 올린다. 그리고 업스케일한 컷과 원본 해상도로 새로 구운 컷을 한 편에 섞으면 같은 편 안에서 선예도가 갈린다 — 그건 편집으로 못 감춘다.
여기서 알게 됐다. 화면비가 되돌릴 수 있는 값인지 아닌지는 애초에 어느 방향으로 만들었는지에 달려 있다. 가로로 크게 만들어 두고 세로로 자르는 건 대체로 된다. 남는 픽셀에서 빼 쓰는 거니까. 세로에서 가로로 자르는 건 없는 픽셀을 요구한다. 같은 「자르기」인데 방향에 따라 한쪽만 성립한다.
「나중에 바꿀 수 있다」고 분류할 때 우리가 확인했어야 할 건 「자를 수 있는가」가 아니라 「자른 뒤에도 목표 규격보다 큰가」였다. 이 질문을 한 번도 안 던졌다.
그리고 이 질문은 던지는 데 5분도 안 걸린다. 곱셈 한 번이고 컷을 굽기 전에도 답이 나온다. 비용이 컸던 건 계산이 아니라 계산할 생각을 안 한 기간이다. 100컷을 편성하는 동안 이 곱셈을 한 번만 했으면 그 100컷은 안 만들었을 것이다. 값싼 검산을 미루면 그 검산이 비싸지는 게 아니라 검산 뒤에 버려야 할 것이 비싸진다.
죽은 것과 살아남은 것을 가른 기준은 픽셀이 아니라 서술이었다
전량 폐기라고 적으면 사실이 아니다. 무엇이 살아남았는지 나누고 보니 경계가 선명했다.
| 내용 | 왜 | |
|---|---|---|
| 죽은 것 | 채택 완성본 12컷 · 세 판까지 반려 반영한 완성본 10컷 · 편성 11편 100컷(9분 17초) | 픽셀이 세로다. 대사가 영어다. 그리고 그중 한 챕터는 대면 장면 자체가 개정 정본에 없다 |
| 살아남은 것 | 인물 레퍼런스 이미지 2장(대표 확정본) · 방벽·razor wire·work light 공간 서술 · 레터박스 스크립트 2종 | 화면비에 안 묶인 것들이다 |
공간 서술은 다른 씬으로 그대로 이식했다. 레터박스 스크립트 2종은 가로 파이프라인에서 그대로 쓴다. 레퍼런스 2장은 애초에 인물 동일성을 잡으려고 확정해 둔 것이라 화면비와 무관하다.
정리하면 화면비에 묶인 산출물은 전부 죽었고, 안 묶인 것은 전부 살았다. 그리고 살아남은 쪽은 공통적으로 픽셀이 아니라 설명이다. razor wire 와 work light 를 어떻게 배치할지 적어 둔 문장은 세로든 가로든 상관이 없다. 그 문장으로 구운 결과물만 화면비를 갖는다.
이걸 알고 나면 작업물을 만들 때 어느 쪽에 시간을 쌓고 있는지가 다르게 보인다. 설명에 쌓은 시간은 규격이 바뀌어도 남고 픽셀에 쌓은 시간은 규격과 같이 죽는다. 이번에 이틀치가 날아간 이유는 그 이틀이 대부분 픽셀 쪽 편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.
한 챕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. 그 장면의 대면 자체가 개정 정본에 없다. 화면비가 맞았어도 못 썼을 컷이라는 뜻이다. 같은 「폐기」라도 규격이 안 맞아서 죽은 것과 이야기에서 사라져서 죽은 것은 성격이 다른데 집계할 때는 한 줄로 합쳐진다. 이 구분을 안 해 두면 나중에 「화면비 때문에 몇 컷을 잃었나」를 물었을 때 실제보다 큰 수가 나온다.
다시 만든 것 — 규격을 먼저 못 박고 그 위에 전부 얹었다
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. 규격을 먼저 확정하고 전 구간을 한 번에 쓰는 것. 구간별로 나눠 쓰면서 규격을 미루면 나중에 바뀔 때 또 앞부분부터 죽는다.
그날 새 편성 프롬프트 1차 55컷을 썼고 자정을 넘겨 나머지 104컷이 닫혔다. 합쳐서 전 구간 159컷 / 859.66초 = 14분 20초다.
- 전 컷 1376×768 — 예외 없음. 「이 컷만 세로가 어울린다」를 애초에 못 만들게 했다
- 길이는 5.17초 격자로 통일하고, 3단계로 전개되는 사건만 5.88초를 줬다
- seed 는
7 + YYYYMMDD + 씬 + 컷규칙으로 기계 생성했다 — 중복 0 - 대사는 개정 정본 원문을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넣었다
길이를 격자로 묶은 것도 같은 이유다. 컷마다 길이가 제각각이면 편성이 바뀔 때 앞뒤가 전부 밀려서 사실상 다시 짜야 한다. 격자에 맞춰 두면 컷을 빼고 넣는 일이 자리 이동으로 끝난다. 이번처럼 위쪽에서 한 줄이 바뀌었을 때 아래쪽이 얼마나 버티는지가 결국 그 아래쪽을 얼마나 규칙적으로 만들어 뒀는지에 달려 있다.
seed 를 규칙으로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. 손으로 넣으면 중복이 생기고 중복이 생기면 다른 컷인데 같은 그림이 나온다. 규칙으로 만들면 중복 여부를 세어서 확인할 수 있다. 159컷을 세어 봤고 중복은 0 이었다.
대사를 그대로 옮긴 줄은 규칙이 아니라 방어다. 대사를 옮기면서 다듬으면 그 다듬은 판본이 사실상 새 정본이 되고 다음에 정본이 또 개정될 때 무엇이 원문이고 무엇이 우리 손이 간 것인지 구분이 안 된다. 이번에 영어 대사를 전부 버리게 된 것도 원본과 산출물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. 한 글자도 안 바꾸면 다음 개정 때 차이만 보면 된다.
같은 날 옛 프롬프트 6폴더 182파일을 별도 폴더로 격리하고 참조 90건을 고쳤다. 이름변경은 170건 전량 인식됐고 그중 161건은 100% 유사도로 붙었다. 백업 파일도 짝 그대로 같이 옮겼다. 정리하려고 옮긴 게 아니다. 폴더만 보고 옛것과 새것이 갈리게 하려고 옮겼다. 같은 저장소에 세로용과 가로용 프롬프트가 섞여 있으면 몇 주 뒤에 누군가 세로용을 열어 가로 편성에 쓴다. 판정을 문서에 적어 두는 것보다 경로를 갈라 두는 쪽이 오래 간다. 문서는 안 읽히면 없는 것과 같지만 폴더 이름은 파일을 열 때마다 눈에 들어온다.
옮기는 김에 참조 90건을 같이 고쳤다. 이게 이관에서 제일 실수가 나기 쉬운 부분이다. 파일만 옮기고 참조를 안 고치면 문서와 스크립트가 없는 경로를 가리키게 되고 그러면 이관이 정리가 아니라 고장이 된다. 백업 파일을 짝 그대로 같이 옮긴 것도 같은 이유다 — 본체만 옮기면 백업이 원래 자리에 남아서 나중에 그 백업이 새것처럼 보인다.
판정이 맞다는 것과 지워도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
여기까지는 기술 판단이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.
죽은 22컷 중 12컷은 대표가 채택한 완성본이고, 10컷은 반려를 세 판까지 반영해서 통과시킨 것이다. 해상도 계산은 우리가 했고 그 계산은 맞다. 그렇다고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.
파일은 하나도 지우지 않았다. 재사용 불가라는 판정만 올리고 실물은 그대로 뒀다.
만든 쪽이 「이건 이제 못 씁니다」와 「그래서 지웠습니다」를 한 호흡에 처리하면 받는 쪽에는 결정할 기회 자체가 안 간다. 폐기는 기술 판정에서 자동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. 별도의 결정이고 그 결정은 그 작업을 채택한 쪽의 몫이다. 우리가 할 일은 판정과 근거를 정확히 올리는 것까지다. 곱셈 한 줄을 그대로 보고에 적은 것도 그래서다 — 결론만 주면 뒤집을 근거가 없다.
계산이 맞다는 확신이 셀수록 이 선을 넘기 쉽다. 768×432 가 1376×768 보다 작다는 건 반박의 여지가 없고 그러면 「어차피 답이 정해졌는데」가 된다. 그런데 우리가 확신한 건 그 컷을 이 편성에 쓸 수 없다는 것뿐이다. 다른 데 쓸 수 있는지, 참고용으로 남길지, 나중에 다시 볼지는 우리가 아는 범위 밖이다. 판정의 범위를 넘어서 처분까지 하는 것이 위험한 건 판정이 틀려서가 아니다. 판정이 답하지 않은 질문까지 답한 것처럼 굴기 때문이다.
그날 실제로 수행한 두 건, 정본을 프롬프트로 옮긴 것과 옛 프롬프트를 격리한 것이 지시 대장에 한 줄도 없다. 지시를 받았고 수행까지 했는데 기록만 없는 상태다. 폐기 판정을 파일이 아니라 문서로 올려 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문서가 읽히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같은 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안 올라갔다는 게 걸린다. 지워도 되는지를 남이 정하게 하려면 그 남이 정할 것이 있다는 사실부터 도착해야 한다. 파일을 안 지운 것만으로는 절반이다.
남은 갈래도 하나씩만 적어 둔다. 그날 영상 산출물은 텍스트뿐이고 mp4 · png 신규가 0건이다. 그리고 가로 전환이 실제로 되는지는 한 컷도 안 구워 봤는데 이제 전 편성 159컷이 그 전제 위에 서 있다. 어제까지 이건 한 챕터짜리 미확인이었다. 하루 만에 전 구간의 전제가 됐다. 미확인 항목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무게가 커진다 — 그 위에 쌓이는 것이 늘어나기 때문이다. 9:16 로 100컷을 쌓는 동안 아무도 그 무게를 재지 않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다. 이번에는 적어도 그 미확인이 무엇인지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게 다르다. 가로 전환 실측 한 컷, 그게 지금 159컷 전부를 떠받치고 있는 유일한 미검증 전제다.